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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공 선생 박세일 행장] 爲公 先生 朴世逸 行狀
 
2022-04-04 13:14:27


爲公 先生 朴世逸 行狀


爲公 朴世逸 선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큰 별이었다.


선생은 대한민국이 세워진 194844, 부친 박성갑과 모친 윤동희의 22녀 중 첫째로 서울에서 태어나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와 선진화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일흔 성상을 오롯이 나라에 관한 걱정과 공부, 諫言唱導에 쏟아부은 의롭고 외로운 巨星이었다. 좌우명으로 삼았던 天下爲公에서 스스로 所志以號雅號가 시사하듯, 선생의 한평생 화두와 논제는 대한민국이었다.


선생만큼 나라의 앞날을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며 온 몸을 던진 위인도 드물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안위보다 대한민국을 더 걱정하고 사랑한 憂國之士였다. 1970정부 활동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을 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선생의 진술에 수사관조차 감동했다고 전해진다. 201711318시 향년 69세로 영면에 들기 직전 선생이 제자들에게 나지막하게 당부한 말씀도 대한민국 잘해라!”였다.


위공 선생은 舊韓末 나라를 잃은 비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학문과 정책 연구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한반도의 선진 통일에 긴요한 自彊, 同盟, 均勢3대 원칙을 정립하고 설파하였다. 선생은 만연한 천민자본주의와 집단이기주의, 自虐史觀과 폐쇄적 종족주의, 편 가르기와 대중영합주의를 경계했다. 선생은 유권자의 합리적인 무관심과 불합리한 편견에 맞서, 정론 확산, 公民 교육과 계몽, 후학 양성에 사재를 헐어 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흠모했던 栗谷 李珥變法更正茶山 丁若鏞이 내세운 經世致用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서울대 스승 林元澤 교수의 나라 사랑과 도쿄대 은사 스미야 미키오(隅谷三喜男) 교수의 가장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유념하라는 가르침도 무겁게 새겼다. 그리하여 선생은 한평생 知行合一, 배움의 실천에 힘썼다. 선생은 1994년 초판, 2000년 개정판을 각각 낸 명저 [법경제학] 서문에서 학문의 목적을 사회적 실천, 사회적 병의 치유와 사회적 악의 억제, 사회적 高揚으로 규정했다.


선생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학하는 법대생이면서도 一身의 영달이 보장되는 사법고시는 포기했다. 그 대신 사회적 격차 완화와 노동자의 인권 개선에 마음이 이끌렸다. 지극히 간절한 發心과 서울 강남 奉恩寺 공양주였던 모친의 인연으로 한때 절에서 求法修行하며 安心法門을 듣고 淸淨法界를 가슴에 담은 선생은 당시 여공들의 비참한 현실에 안쓰럽고 안타까운 菩薩心을 억누를 수 없었다. 1970년 봄 대학을 졸업하며 동생들을 부양하고자 한국산업은행에 들어가서도 선생은 틈틈이 불우 청소년을 가르치는 야학에 봉사했다.


위공 선생은 1973~1975년 도쿄대 대학원 경제학부 유학 시절 도쿄여대 池明觀 교수가 익명으로 발간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숨은 조력자로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했다. 선생은 1975~1980년 미국 코넬대 박사과정에서 노동경제학 탐구에 힘쓰던 때에도 교포 학생들에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가르치며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선생은 1980년 여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선 내정된 세계은행 취업을 포기하고 곧장 한국개발연구원에 합류해 노사관계를 천착했다. 코넬대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 조미경 여사도 어릴 적 이민을 떠난 재미교포였지만, 기꺼이 선생을 따라 환국했다.


1985년 모교 서울법대의 조교수로 부임한 선생은 제자들에게 판검사보다 행정부 공무원으로 爲國獻身先公後私를 실천하라고 간곡하게 권유했다. 이에 선생의 뜻을 좇아 행정고시를 거쳐 정부에서 일한 제자만 수십 명에 이른다. 선생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학계언론계법조계문화계의 지성들을 모아 마당우리 모임을 시작으로 1989<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세워 정부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대안도 함께 제시하는 시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러한 노력은 문민정부1993년 전격 시행한 금융실명제와 1995년 도입한 부동산실명제의 초석이 됐다.


선생은 뜻하지 않게 김영삼 대통령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1994년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이듬해 사회복지수석비서관의 중책을 각각 맡았다. 당시 선생은 100년 전 근대화 개혁의 몸부림이던 甲午更張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며 마침내 국권을 잃은 쓰라린 전철을 되밟지 말자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세계화, 교육개혁, 사법개혁, 생산적 복지와 노사관계 개혁 등 국가 시스템을 격상하는 굵직굵직한 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이들은 절반의 성공과 미완의 개혁에 그쳤지만,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만큼은 선명하게 밝혔다.


1998년 새 정부가 들어서며 관직에서 물러난 위공 선생은 1년 동안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비전을 가다듬고 국가발전전략을 벼렸다. 1999년 귀국한 선생은 한국개발연구원의 국가정책대학원 석좌교수를 거쳐 2001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취임해 나라를 이끌 棟梁의 양성에 힘썼다.


위공 선생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後暴風으로 야당이 지리멸렬하고 집단최면이 널리 퍼지며 여권의 일당 지배 유혹이 고조되자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탄식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구국의 일념으로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해 제17대 총선 공동선대위원장과 여의도연구소장으로서 당의 쇄신과 함께 무너진 견제와 균형의 복원을 주도했다. 선생은 2005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의 중책을 맡았으나, 행정수도 분할과 반통일적 수도 南進에 결연히 반대한 끝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국민에게 돌려드렸다. 건국 이후 정책 소신을 지키고자 의원직을 사퇴한 첫 사례였다. “한나라당은 지금 죽고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 살고 영원히 죽을 것인가?”라는 선생의 당시 일갈은 오래도록 큰 울림을 남겼다.


선생은 야인이 되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학습모임과 구국운동을 이어갔다. 1980년대 중반 선생이 결성한 <安民山友會>를 모태로 1996년 닻을 올린 <자유포럼>1999<安民정책포럼>으로 확대 개편했다. 선생은 2006년 미국 헤리티지재단을 본뜬 민간의 정책 싱크 탱크로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창립해 2013년까지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지구촌의 문명 표준을 수용하지 못했던 大韓帝國이 끝내 망국에 이른 뼈아픈 교훈을 되새겨, 선진국 도약과 후진국 추락의 갈림길에 선 나라의 항로를 바로잡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선생은 <한반도선진화재단>이 내건 富民德國의 꿈, 緣起中道共同體自由主義 이념과 先進化 전략 덕분에 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고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선생이 제시한 선진화화두는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지표(‘선진일류국가’)와 다양한 국정과제(‘공공기관 선진화’, ‘노사관계 선진화)에 원용되어 빛을 발했다.


2010<한반도선진화재단>이 발표한 서울 컨센서스도 선진화와 통일을 21세기 국가 과제로 손꼽았다. 선생은 이를 쉽게 풀어쓴 역작 [21세기 한반도의 꿈: 선진통일전략]2013년 출간하였다. 선생은 통일의 새벽이 왔으나 그 준비는 여전히 한밤중이라며,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지금껏 대북 정책의 목표는 통일이 아니라, 북한의 도발을 막는 데에 급급한 한반도 분단 유지에 그쳤다고 우려했다. 선생은 북한이 제2의 티베트로 전락해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고착되고 동해안엔 중국 배가 다닐 위험을 엄중히 경고했다.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선생은 2011년 민간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끝에 그 중추로 <선진통일연합>을 결성한 데 이어, 2014년 이를 <선진통일건국연합>으로 격상했다.


위공 선생은 201111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직에서 물러나,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의 심정으로 제19대 총선을 앞둔 20122<국민생각>을 창당해 당 대표를 맡았다. 선생은 殺身成仁死卽生의 각오로 내키지 않았던 지역구 출마까지 감행했으나, 신생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낙선하였다. 못내 아쉬웠지만, 선생은 역사는 현실주의자의 성공이 아니라, 이상주의자의 실패로 발전한다.”라며 동지들을 다독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정국이 뒤숭숭하던 2016년 늦가을, 선생은 義兵將의 결기를 다지며 <대한민국 국민포럼>을 창립했다. 창립대회장 연단을 오르다 두 번이나 휘청거릴 정도로 쇠약해져 선생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때였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어지러운 정국에 나침반이 될 [대한민국 국민 포럼의 주장신념강령]을 발표했다. 곧 닥칠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혼신을 바쳐 선생이 집필한 唱義文이었다.

 



위공 선생은 聖人 못지않게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녔었다. 선생은 內佛外儒의 자세로 自利利他成己成物에 진력하였다. 열여섯 살 때 중생을 구제하겠다며 출가를 꿈꾸기도 했던 선생은 世尊大悲救世를 계승한 救國救世孔子齊家治國의 가르침을 늘 實踐躬行하였다. 선생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 법사 光德 스님의 普賢行을 받들어 국가를 위한 헌신 봉사가 곧 수행의 길이라 여겼다. 1996<청와대 불자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이때도 普賢菩薩의 실천행을 念念相續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발원했다.


이처럼 선생은 自性佛君子가 되기 위해 용맹정진한 수도자였고 道學者였다. 선생은 마음이 차분하고 머리는 치밀하며 때론 냉철했지만, 가슴은 따뜻한 학자였다. 선생은 남에겐 봄바람처럼 너그럽고(待人春風),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한(持己秋霜) 襟度를 지킨 덕망가였다. 선생은 말하기에 앞서 많이 듣고(善聽), 최선만 우기지 않고 차선을 받아들이며(虛心), 不偏不黨, 無私愛民非禮不動을 실천한 一世의 선비였다. 선생은 활짝 열린 마음을 지닌 세계주의자요, 인간의 존엄을 至高至善의 가치로 삼은 박애주의자였다.

선생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心學)에 그치지 않고, 동서고금의 安民學까지 섭렵한 석학이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법경제학계의 泰斗, 노동경제학계의 거목이었다. 또한, 선생은 현대사의 고비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파한 선지자였다. 선생은 홍익인간, 佛國土와 대동세계를 구현하고자 경제정의, 세계화, 선진화와 국가 개조를 앞장서 부르짖은 전도사였다.


위공 선생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와 세계평화주의에 기초하여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으로 공동체자유주의를 개척한 뛰어난 사상가였다. 선생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한반도의 선진 통일을 열렬히 주창한 통일운동가였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는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두루 품은 불세출의 경세가였다. 선생은 백년대계의 時平, 東道西器의 비전, 實事求是의 방략을 아우른 현인이었.


선생은 철학, 역사, 정치, 외교, 남북통일, 법률, 경제, 노동, 교육, 복지 등 전방위에 걸쳐 방대한 저서, 논문, 보고서와 유작을 남겼다. 선생은 1987년 한국경제학회가 뛰어난 젊은 학자에게 수여하는 영예로운 靑藍賞을 받았다. 선생은 연설, 강연, 발제, 성명, 시론, 기고, 대담, 면담과 회견 등을 통해서도 우리 모두 깨달아야 할 탁월한 혜안과 곱씹을 귀중한 교훈을 일러주었다. 후학들과 함께 四書三經을 공부했던 <安民學堂>에서 발표한 [지도자의 길]에서 선생은 지도자가 갖춰야 할 4가지 덕목으로 愛民修己, 비전과 방략, 求賢善聽, 後史回向을 손꼽았다.


절박하고 사무친 우국충정으로 잠시 정치권에 몸담기도 했지만, 위공 선생은 立身揚名엔 뜻이 없었고 당리당략은 멀리했다. 선생의 관심은 오직 救世安民에 있었고, 그 잣대는 한결같이 국리민복이었다.

 

선생은 위정자의 귀감이었고, 공직자의 표상이었다.

선생은 지식인의 典範이요, 道伴의 향도였다.

선생은 개혁적 보수의 대부였다.

선생은 대안까지 내놓는 합리적 시민운동의 창시자였다.

선생은 후학과 제자의 師表였다.

선생은 우리 모두의, 한민족의 걸출한 지도자였다.

 

어쩌랴, 위공 선생이 떠난 뒤 나라가 더 어려워졌다. “눈이 내린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 줄 안다(雪後時之松柏操)”라더니, 나라가 어수선하고 위태로우니 선생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고, 선생에 대한 마음의 빚도 덩달아 늘어났다. 마치 舊韓末이 연상되는 참으로 어지러운 시기에 선생이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몸도 마음도 條件生條件滅이요, ‘刹那生刹那滅이라는 선생의 깨침을 익히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생의 유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동지, 道伴, 후학과 제자인 우리는 선생의 위대한 유산이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아래와 같은 굳은 각오를 이 비석에 담는다.

 

선생의 거룩한 뜻과 원대한 꿈을 착실히 이어간다.

선생의 빼어난 혜안과 무거운 경고를 늘 새긴다.

선생의 뜨거운 열정과 치열한 발자취를 잊지 않는다.

선생의 넉넉한 度量과 실용의 슬기를 본받는다.

선생이 그린 富民德國針路를 따른다.

선생이 밝힌 救國救世의 등불을 놓지 않는다.

선생처럼 普賢行願을 실현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늘 갈고닦는다.

선생이 떠난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도록 힘쓴다.

 

위공 박세일 선생, 염치없지만 마지막까지 무거운 짐을 앙청하오니, 선생의 법명처럼, 부디 하늘에서도 대한민국을 굽어살펴 한민족과 인류를 바른길로 이끄는 領星이 되어주소서!

 

2022331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春塘 朴宰完 奉呈



추가할 내용이나 잘못된 기술이 있으면 재단으로 메일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재단 메일주소: hansun@hansu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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